내가 유별나게 집착하는 것 중 하나는 '비빔면을 맛있게 끓이는 것'이다. 근본의 팔도비빔면
요즘 취준을 하며 내가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무엇이 있나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비빔면을 잘 끓이는 것도 문제 해결 경험으로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PM이 문제를 정의하고 개선해나가는 프로세스에 내가 비빔면을 맛있게 끓이게 된 과정을 대입시켜 보았다.
아래 글은 진지하게 써져 있지만 가볍게 읽어주세요.
1. 배경
어렸을 적 어머니가 비빔면을 시원하게 먹으라고 얼음을 넣어주시곤 했는데, 점점 싱거워지는 면과 바닥에 흥건한 국물(..)이 정말 먹기 싫었던 기억이 있다.
2. 문제 정의
나이를 좀 먹은 뒤 내가 비빔면을 끓여먹기 시작했는데, 비빔면이 제철인 여름에 오히려 면을 식혀야 하는 수돗물이 미지근해서 비빔면이 시원하지가 않았다.
또한 물기를 뺄 때는 다 뺐다고 생각했는데, 먹다 보면 바닥에 물이 생겨 싱거워지곤 했다. 그렇다고 그냥 오래 놔두자니 차가웠던 면이 미지근해지고 말라버렸다. 따라서 물을 빠르게 잘 빼낼 방법이 필요했다.
3. 지표 설정
따라서 나는 두 가지 지표를 개선시켜야 했다.
면의 온도 — [목표] 10℃ 이하로 감소
면의 수분 함유량 — [목표] 식사 종료 시 남은 물이 없을 정도로 감소
그러면서도 다음과 같은 지표가 너무 크게 증가하면 안 됐다.
조리시간, 조리과정 — 기존보다 2배 이상 증가 시 라면을 먹는 이유에 배반됨
비용 — 어떠한 추가적 비용도 발생하지 않아야 함
가설 설정 및 A/B테스트
실제로 두 개를 끓여 비교한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먹을 때 하나의 새로운 방법만 시도해보며 변인을 최대한 통제했었다. 경험적으로 A/B 테스트가 가능했달까.
가설 1. 냉장고에 면을 넣어놓으면, 차가워지고 수분이 빠질 것이다
가장 처음 시도 했었던 방법이다. 면이 차가워지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시간이 더 오래 걸렸고, 결정적으로 면의 겉면만 과하게 말라서 맛이 없어졌다. 해당 가설은 폐기.
가설 2. 물에 얼음을 미리 넣어놓으면 면이 충분히 차가워질 것이다
이 가설은 당연하지만 성공이었다. (이 생각을 하기까지 오래 걸렸을 뿐) 면을 획기적으로 차갑게 만들어주면서도 수분함유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수분함유량을 낮추기 위한 방법이 따로 필요했다.
가설 3. 면을 털지 않고 관성을 이용해 물을 빼면 더 잘 빠질 것이다
나만 그랬나 싶지만 보통 면의 물을 뺄 때 채반에 담아 탈탈 털곤 했다. 하지만 문득 이 탈탈 터는 행위가 물의 하강을 오히려 막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나름의 솔루션을 개발했다. 채반을 잡은 채 아래로 자유낙하 시키다가 스냅을 통해 확 들어올려 주는 것이다. 면은 올라가지만 물은 관성의 영향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해보면 안다.)
이외에도 훨씬 많은 실험을 통해서 알아낸 노하우들이 있지만 영업비밀이다. 어찌 됐든 가설 2, 3번에서의 솔루션으로 나는 지표 달성에 성공했다.
검증
하지만 '이러한 지표 개선이 실제 고객 만족으로 이어지는가'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일단 내가 먹기엔 맛있어졌지만 변태처럼 집착하다 객관성을 잃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우선 칭찬에 인색한 가족들에게 비빔면을 만들어줬고, 내가 한 것이 더 맛있음을 확인받았다. 그 뒤로도 기회를 호시탐탐 보며 다양한 사람들에게 내 비빔면을 먹이고 반응을 확인해왔다. 누군가와 비빔면을 먹을 일이 있으면 무조건 내가 끓이고는 반응을 확인했다. 대체로 평가는 좋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됐다.
Lesson Learned
3인분 이상을 끓일 때는 추가적인 변수 고려가 필요하다
3인분부터는 면이 고르게 익지 않거나 잘 퍼지며, 물을 빼는 난이도가 매우 상승한다. 충분히 큰 냄비가 없다면 따로 끓이거나, 물을 나누어 빼는 등의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환경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가평 펜션에 놀러갔다면 얼음 또는 차가운 물이 없거나 채반이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사실 최상의 맛을 낼 수 없다. 사전에 환경 조건을 잘 파악한 후 밑밥을 깔아두어야 민망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
예) 아 여기 채반이 없어서 원래 내가 하던 맛이 안 나오겠다..
억지로 끼워맞춘 거라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제 해결과 지표 개선이라는 점에 큰 맥락은 같다고 생각한다.
난 사실 이런 과정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왔다. 좋게 포장하면 문제 해결 능력과 근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